[기고] ‘서해수호의 날’ 생각하다
충남동부보훈지청장 채순희
기사입력: 2017/03/20 [23:21]  최종편집: 뉴스충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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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기자

봄기운이 완연해지고는 있지만 바람결에는 여전히 쌀쌀함이 묻어 있다.

금년 3월 24일은 두 번째 맞는 ‘서해수호의 날’이다. 서해수호의 날을 며칠 앞두고 참으로 오랜만에 집에서 가까운 서해바다를 찾았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은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더 없이 평화롭고 풍요롭다. 망망한 물결위에 스치는 바람이 잠들었던 기억을 일깨운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나는 7시부터 시작되는 강의를 듣기위해 학교로 가는 택시 안에 있었다. 운전석 옆에 설치된 소형 TV에서는 그 날 발발한 연평도 포격 장면을 긴급뉴스로 계속 다루고 있었다. 그로부터 8개월 전인 3월 26일 서해를 지키던 46명의 용사가 전사한 천안함 피격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생각은 우려로 끝났다. 2002년 6월 29일 온 국민이 한일월드컵으로 들떠있을 때 북한 경비정이 서해 NLL을 침범하여 우리의 고속정을 공격했다. 그로인해 우리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을 입고 말았다. 제2연평해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서해바다에서 예고없이 자행되는 북한의 도발은 우리 장병들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고,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서해바다는 역사적인 사건의 격전지였고 그 결과는 우리민족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곤 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의 구실이 된 운요호사건이 강화도 앞바다에서 일어났고,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다툰 1894년 청일전쟁의 시작도 아산만 앞바다인 풍도였으며, 1904년부터 1905년까지의 러일전쟁의 시작 또한 일본의 인천상륙이었다. 두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으로 인해 우리는 식민지시대의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한편, 6․25 전쟁당시 유엔군의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서해바다는 바로 이런 곳이다. 국가 안보와 국민 안위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수호해야 하는 곳인 것이다.

‘서해수호의 날’은 북한의 도발에 맞서 고귀한 생명을 바친 호국용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국민과 함께 추모하고, 6·25전쟁 정전 협정이후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을 상기하며 국가안위의 소중함을 다지기 위한 날로, 정부는 천안함 피격이 있었던 3월 넷째 금요일을 ‘서해수호의 날’로 지정하였고 중앙기념식과 지방기념식을 전국적으로 거행한다. 금년도 3월 넷째 금요일에 해당하는 24일에는 대전현충원에서 전사자 유족 · 정부주요인사 · 부대원 · 시민 · 학생 · 장병 등 7,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기념식을 거행하여 전사자 묘역 참배 · 영상물 상영 · 기념공연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한편, 천안시는 천안시의 주관으로 천안함 전사자 명비가 있는 ‘천안인의 상’ 동산에서 추념식을 거행하고, 세종시 안보단체 협의회 주관으로 안보결의 대회도 개최한다.

율곡선생은 역사적 사건을 대하는 교훈을 ‘성학집요’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만 기억하고 배우는 것은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자신이 그 일의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살펴보고, 스스로 내가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서해수호의 날을 계기로 실시되는 각종 행사와 활동에 직접 참여하여 서해 수호의 중요성을 새겨보는 한편,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 오늘날 제기되는 국가안보 위기상황에서 각자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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