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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0주년을 기념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

충청인 | 기사입력 2016/02/22 [11:14]

[기고]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0주년을 기념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

충청인 | 입력 : 2016/02/22 [11:14]

2016년 2월 21일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뤼순감옥에서 순국한지 80주년이 되는 아주 뜻깊은 날이다.

국가보훈처는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0주년을 기념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2월 21일 오전 10시 30분 충북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 소재 단재영당에서 추모제를 개최했다

(사)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원웅) 주관으로 열린 이날 추모식에는 김종술 충북남부보훈지청장을 비롯한 각계인사와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및 회원, 유족, 시민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한편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와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서는 지난 2월 19일 오전 10시 청주 예술의 전당 선생 동상 앞에서 도종환 국회의원, 정병걸 충북도 부교육감, 이경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와 시민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을 개최한 바 있다. 추모식은 춤패 너울 진혼무 공연을 시작으로 단재 선생 약력 보고, 동상 건립 과정 소개, 추모사, 헌화 순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2월 19일부터 2월 21일(일)까지 신채호 선생 동상 앞에 추모단을 마련해 놓아 시민 누구나 헌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시민 추모 참배기간’을 운영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존영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現 대전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신광식(申光植)이며 모친은 밀양박씨이다. 본관은 고령신씨이고, 호는 단재·일편단생·단생이며,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이다.

어릴 적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 부터 한학을 익혔고,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그는 성균관에서 개화사상을 접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해 적극 활동하였다.

1905년 4월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바로 사직한 그는 그 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황성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양기탁의 요청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하며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민족이 힘쓸 것을 역설하였다.

1907년 안창호, 이갑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신민회의 이념을 논설에 반영하는 등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선생은 그 해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기호흥학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뿐만 아니라,『독사신론』을 비롯한 많은 역사 관련 서적을 저술하여 근대민족사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1909년에는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는 데에 앞장섰다. 1910년 4월에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평안북도 오산학교를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조직된 항일단체인 권업회(勸業會)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인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주필로 활동하다가, 19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일대 부여, 고구려, 발해 유적지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했다. 19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힘썼다. 베이징으로 건너가 비밀결사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고, 신대한청년동맹(新大韓靑年同盟) 부단주(副團主)가 되었다.

1919년 상하이에서 거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며,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임시정부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맞서기도 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소수의 의견만으로 소집되어 불완전한 상태이며 항일운동을 전개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조직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주장했기에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부적절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으며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는 창조파(創造派)의 주동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개조파와 대립하여 임시정부의 존폐문제를 논했으나 논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신채호는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항일비밀단체인 다물단(多勿團)을 조직에 가담하여 지도했으며, 본국의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했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1928년 잡지『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2월 21일 옥사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평생 문인으로, 언론인으로, 역사학자로, 항일독립운동가로 조국의 발전과 독립을 위해 희생 봉사했다.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은 적과 타협 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하고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런데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장인 권희영이 서울에서 개최된 어느 학술세미나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을 “네자로 말하면 정신병자, 세자로 말하면 또라이”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해 진보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애국 시민들을 분노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신채호 선생 추모행사가 신채호 선생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대전보다 충북 청주에서 더 많이 개최되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대전에서도 신채호 선생을 추모하는 행사를 충북 청주 못지않게 많이 개최하여 대전 시민들이 신채호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많이 본받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관계 당국이 어느 누구도 신채호 선생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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