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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우리 한글

충청인 | 기사입력 2011/08/10 [21:20]

[데스크칼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우리 한글

충청인 | 입력 : 2011/08/10 [21:20]

훈민정음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만든 글자였다. 훈민정음을 통해 어리석은 백성들이 유교적 소양을 갖춘 신민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려 했다. 그런데 세종은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지배 계층이 먼저 훈민정음을 배우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1446년 10월 4일 우참찬 정갑손은 대자암에서 불교 행사를 하려고 하니 중지시켜야 한다고 임금께 상소를 올린다. 세종은 점잖게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고 신하들에게 양해를 구했으나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불사를 중지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온다.

이에 10월 10일에 대간의 죄를 한글로 써서 환관을 시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여 주고 죄주려 하였다. 그런데 신하들이 거듭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자, 세종은 마침내 대간들을 석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12월에는 하급관리인 서리를 뽑는 과거과목에 훈민정음을 포함시키라고까지 명한다.

세조도 언문을 퍽 사랑하였다. 아버지 세종의 명을 받아 석가의 전기인 ‘석보상절’을 짓고, 아버지가 지으신 ‘명황계감’을 서거정을 비롯한 관리들에게 언문으로 번역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한글로 인해 우리나라는 책 나라로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한문을 읽고 쓴다는 사실이 당시 그 나라의 문화 수준과 국가 위신을 가늠하는 척도였고, 한문만이 권위를 가진 글이었기 때문에 조선처럼 중국에 사대하는 나라로서는 당연히 한문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한문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들은 표의 토씨가 잘못 된 것까지 까탈을 부렸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또 한 번의 영토 확장을 하게 된다. 임진왜란을 맞아 선조가 언문으로 교서를 내린 것이다. 언문으로 교서를 내리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선조는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둘째 아들 초의 막내 아들인 하선군으로 정통성 문제가 항상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심양으로 피란 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언문으로 교서를 내리겠는가. 원님들까지 다 도망을 가고 믿을 곳은 의병뿐이었다. 의병은 천민들이 많았다. 공을 세운 천민들은 신분을 상승시켜 주고, 땅과 관작까지 주게 된다. 언문 교서는 의병을 독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실의 언문 교육도 심화되어 갔다. 어려운 한문을 언문으로 풀이하여 가르쳤다. 그리고 서서히 백성들도 언문을 익혀갔다. 영조 때는 조선의 공용문자로 입지를 굳혀 갔다. 언문으로 상소가 올라오고, 밀계를 하고, 점점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

언문은 수렴청정에서 또 다시 위력을 발휘한다. 인수대비는 정희왕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희왕후는 성종의 첫 부인 한씨가 후사 없이 죽자, 후궁 중에서 용모와 심성이 출중하고 몸가짐이 조신한 숙의 윤씨를 중궁으로 삼는다. 집안이 미천한데다가 과부의 딸이었는데 후궁 출신이어서인지 투기가 심하여 1479년 폐위된다. 중궁 폐출이라는 전대 미문의 사건의 발단은 다름 아닌 언문 편지였고 연산군 시절 엄청난 불행을 불러오고 만다.

1623년 3월 14일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위하라는 추상같은 언문 교서를 내린다. 인목대비는 18살에 쉰한 살의 선조와 결혼하여 영창대군을 낳는다.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새어머니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마저 귀양을 보내 죽게 한다. 3월 12일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는 폐위된다.

1863년 12월 8일 강화도령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신하들은 대왕대비인 조대비를 찾아간다. 대왕대비는 발안에서 언문 교서 한 장을 내놓았다. 흥선군의 둘째아들 이명복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는 것이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언문은 소설 속으로도 들어갔다. 16세기 초반 채수가 쓴 ‘설공찬전’ 소설이 큰 인기였다. 뒤따라 산국지가 인기를 끌었고, 언문 소설이 나타났다. 책을 빌려주는 쾌가에서 비녀를 팔아 언문 소설을 빌려봤다는 기록도 보인다. 책을 언문으로 읽어주는 ‘전기수’라는 직업인도 나타났다.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이 언문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라 하여 한 때 주춤거렸으나 언문은 곧 국문이 되었다. 19세기 말 개화기에 언문은 일대 변혁을 겪는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언문이 나라를 대표하는 공식 문자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대변혁이었다.

정보화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우리 한글은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에게 수출되어 세계 속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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